마지막 항해였는데..
아들 품에 안겨 돌아온 남편

제가 (남편)꿈을 꾸면 항상 나 살아있다고 저도 믿기지 않지만아마 본인도 그렇게 자기가 죽을거라고 생각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 같아요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 코로나19로 남편 강병화(65) 씨를 떠나보낸 조은희(가명·61) 씨는 꿈에서 남편을 만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고 말하던 남편은 선박 기관사로 한 해 대부분을 배에서 보냈다. 부부는 한 평생 ‘오래 헤어졌다 짧게 만나는’ 이별의 삶을 반복해왔다. 그런데 이번 이별은 달랐다.

올봄 먼 바다로 떠났던 병화 씨는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라지지 않은 ‘1’

‘나도 확진이 됐어.’ 5월 5일이었다.

열은 안 나고 몸에 힘만 조금 없다고 하던 남편. 간이검사 결과 배에서 기관장 강 씨를 포함해 7명이 확진됐다고 했다.

코로나는 불쑥 찾아왔다.

3월 출항 이후 ‘괜찮다’던 남편의 답이 아랍메이리트로 향하면서 조금 달라졌다.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
남편은 ‘사막의 온도차가 심해 흔히 걸리는 사막 감기인 것 같다’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은희 씨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카톡 메시지로 몸 상태를 물어보는 게 전부였다.

이틀 뒤 5월 7일. 카톡이 한 통 은희씨에게 왔다.

‘오늘은 좀 어때?’ 다음 날 아침 은희 씨가 카톡을 보냈지만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답장을 못해도 카톡은 읽을 텐데...

불안했다.

아들 수혁(가명·39) 씨는 따로 연락이 온 건 없으니 큰일은 없을 거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전날 밤 수혁 씨도 어버이날을 맞아 아버지와 연락했다.

아들 부부는 카네이션 사진과 함께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건강한 몸으로 귀국할게’라는 말과 함께 방긋 웃는 이모티콘을 남겼다.

지난해 선내 기관실에서 아내가 찍은 기관장 강병화 씨.이 사진이 아내가 찍어준 병화 씨의 마지막 독사진이 됐다.

유가족 제공

아버지는 아들 부부에게 건넨 마지막 말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낯선 이별, 낯선 배웅

아랍에미리트에서는 코로나로 사망한 병화 씨의 시신을 병원에 안치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강 씨는 그렇게 이틀을 배 안 차가운 냉동고에서 보냈다. 병화 씨가 선내 냉동고에 있다는 소식에 온 가족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마단 기간이라 모든 일상이 멈춘 상태였다.

가족들은 고국으로 병화 씨를 제대로 모시고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코로나는 온전한 슬픔도, 마지막 배웅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현지 영사관의 도움 덕분에 병화 씨 시신은 육지 병원으로 옮겨졌다. 가족을 대표해 아들 수혁 씨가 아랍에미리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9일 만이었다.

해외에서 돌아가시다 보니까 돌아가셨다고 마음 놓고 슬퍼할 수가 없고하루라도 빨리 모시고 올 수 있게끔 해야겠다. 장례식장에 벤을 타고 (유골함을) 안고 왔는데 모셔드리고 나서야 이제 제대로 장례도 치르고 우리 가족도 제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슬퍼할 수 있겠다

낯선 타국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불확실한 절차의 연속이었다. 12시간 만에 현지에 도착한 수혁 씨에게 아랍에미리트 당국은 아버지를 현지에 묻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 사망자는 타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코로나 사망자 시신을 운구할 비행기도 구할 수도 없는 상황. 고국으로의 시신 운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골이라도 모시고 돌아가는 게 최선이었다. 병원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눈을 감고 편안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수혁 씨는 염도 제대로 못한 아버지를 위해 평소 즐겨 입으시던 외투를 덮어드렸다.

“제사상에 과일을 넉넉하게 올려드리게.”

아버지의 동료는 수혁 씨에게 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했다. 탈수 증상 탓인지 오렌지를 먹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동료는 배에 오렌지가 없어 대신 사과를 깎아드렸다. 그는 오렌지를 못 드린 게 계속 마음에 남는다며 수혁 씨 손을 꼬옥 잡았다.

아랍에미리트에는 제대로 된 유골함조차 없었다. 수혁 씨는 철제함을 손수 구입한 천으로 정성스레 감쌌다. 아들은 부산의 장례식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 유골함을 꼭 껴안고 품에서 놓지 않았다. 은희 씨는 남편과 아들 걱정에 매일 수면제와 신경 안정제를 말없이 삼켜야 했다.

보고싶은 남편

한 집에 있는데도 보고싶다고 해요. 내가 옆에 있는데 뭘 보고싶냐그러면 옆에 있어도 보고 싶대 너무 사랑해주고 좋아해줬던 거 고맙다고.

“낑낑, 이번엔 술도 좀 줄이고 건강관리 잘해서 돌아올게.” “꽁꽁, 병원도 없는 시골에서 살려면 건강하게 돌아와야 돼요.”

환갑을 넘겼지만 부부는 둘만의 애칭 ‘낑’과 ‘꽁’으로 서로를 불렀다. 병화 씨는 배가 육지 근처에 다다라 카톡을 할 수 있는 상황이면 어김없이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한집에서 사는 부부보다 더 많이 서로의 일상을 꿰고 있었다. 아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지금 시간대엔 뭘 하는지, 오늘은 어디에 가는지 등 일거수일투족을 이야기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까진, 국내 항구에 정박하면 ‘꽁’은 늘 잠깐이라도 ‘낑’을 만나러 집에 들렀다.

아내 은희 씨가 그린 부부의 초상화.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가까웠다.

유가족 제공

이번 항해는 42년 기관사 생활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항해였다. 부부에게는 꿈이 있었다. 병화 씨 고향인 강원도 인제 산골마을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는 꿈. 병화 씨는 내년부턴 고향에서 강태공처럼 살 거라고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항해를 떠나며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11월에 귀국할 예정이던 병화 씨는 계획보다 빨리 5월 22일, 아들의 품에 안겨 돌아왔다. 마지막 항해를 마쳤지만 선원수첩 마지막장 하선기록은 텅 비어 있다.

지난 3월 항해를 떠났던 병화 씨의 선원수첩 마지막장에는 하선기록칸이 비어 있다.

유가족 제공

열심히 살았던 남편이자 아버지

고향에서 강태공 노릇하면서 살거라고 희망을 걸고 갔죠.비록 거기서지만 거기 묻히면 행복할 것 같아서.고등학교 후배되시는 분이 장지를 다 꾸며줬어요.

삼일장을 마친 병화 씨는 고향마을에서 자연으로 돌아갔다. 후배는 “형님이 고향으로 돌아오신다기에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렇게 오시면 어떡합니까”라며 슬퍼했다.

병화 씨는 마을에서 손꼽히는 수재였다. 1980년대 최고의 수재만 간다는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기도 했다. 수학과 물리에 관심이 많아 물리학도를 꿈꾸기도 했다. 여러 사정으로 국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해양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렇게 병화 씨는 해기사가 됐다.

병화 씨는 손재주도 좋았다. 직접 나무를 깎아 대금을 만들어 연주했다. 언젠가 해외 벼룩시장에서 색소폰을 사왔다. 혼자 색소폰을 익혀 어머니 팔순잔치와 두 아들 결혼식 때 축주를 했다. 하객들은 노래를 따라부르며 훈훈한 순간을 함께했다.

병화 씨는 모든 일을 열심히 즐겁게 했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자신이 만든 가훈 ‘열심히 즐겁게’를 매 순간 실천했다.

동료들도 병화 씨를 ‘열심히 즐겁게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한번 배에서 내리면 같은 선원을 다시 만나기 어렵지만, 병화 씨는 옛 동료들과 수시로 연락했다. 미얀마 출신 한 선원은 병화 씨 부고를 접하고 ‘기관장님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오기도 했다.

한번 하선하면 다시 만나기 힘든 외항선. 외국인 선원들은 그의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애도하고 슬퍼했다.

유가족 제공

마지막 기도

“남편에게 사랑해 줘서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 옆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마음껏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바로 바로 말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오늘은 절대 후회 없는 오늘이 될 거예요.”(아내 은화 씨)

“유언을 하신 적은 없지만 평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기관장으로서 보여주신 행동이 유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아들 수혁 씨)

두 달 남짓, 가족들은 병화 씨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보다 의미 있게 병화 씨를 애도하려는 마음에서다.

은희 씨는 남편과 함께 배를 탔던 선장을 위해 기도한다. 코로나 확진자 중 한 명인 선장은 지금도 아랍에미리트 현지 병원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가족들은 평생 외항선을 타다 외로이 생을 마감한 병화 씨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여기려 한다. 백신을 맞지 못 했던 병화 씨 같은 외항선 선원(해외취업 선원)을 위해, 최근 백신 우선접종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국적과 상관없이 선원들의 병원 이송이 원활하도록 외교부에서 노력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가족들은 오늘도 기도한다. 병화 씨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두 아들의 결혼식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던 병화 씨.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림=성유진 작가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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