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뼛가루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하얀 구름이 아침 태양 앞에서 서서히 걷히면서 모든 세상 걱정, 바이러스도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요.’

SNS 글귀에 쓸 정도로 유난히 코로나 바이러스를 신경썼던 아버지였다. 향년 54세. 최광윤 씨는 바이러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얀 구름이 되어 가족 곁을 떠났다.

고 최광윤 씨는 아침 햇살에 구름이 걷히듯, 코로나 바이러스도 사라지길 바랐다.

그림=성유진 작가
아빠는 이겨낼 수 있어

올 3월 1일은 결혼 31주년이었다. 그때 기념여행을 떠났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하루 전, 미림(30)·다슬(27) 씨 자매는 용돈을 두둑이 넣은 케이크를 깜짝 선물하며 여행을 권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공장 일도 있고, 코로나로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부모님은 여행 대신 서울 본가를 찾았다. 할머니·할아버지의 기력이 부쩍 쇠하셨다고 했다. 7남매 중 외동이었던 아버지는 귀하게 자란 만큼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챙겼다.

바이러스는 ‘효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틀 뒤인 3월 3일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입원 전 검사에서 할머니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이다. 황급히 주변 가족·친지가 코로나 검사를 받고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버지도 양성 판정을 받았다.

할머니께서 코로나 양성 판정을 먼저 받으셨어요. 저희는 충격이었고 접촉했던 엄마, 아빠와 언니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아빠가 양성이 나오신 거죠.

뒤이어 어머니 신현진(52) 씨와 할아버지도 양성 판정을 받았다. 할머니·할아버지를 돌보던 요양보호사도 양성이었다. 어머니는 12일 만에 퇴소했지만 아버지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센터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큰 병원으로 이송됐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회복할 줄 알았어요. 담당의사도 젊으니까 이겨낼 거라고 했고요.”

기저질환도 없고, 술·담배도 즐기지 않았던 아버지. 병원에서 갑자기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온 가족이 병원으로 향했지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이미 인공호흡기를 꽂은 채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기저질환도 없으셨고 술도 즐기지 않으셨고 담배도 안 태우셨고….갑자기 병원에서 연락 온 게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합니다.가족들 얼굴 한 번 보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연락이었죠.

바로 다음 날 에크모(ECMO·체외막 산소 공급장치) 시술에 들어갔다. 마침 할아버지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첫째 딸 미림 씨는 할아버지를 아버지 공장 근처 요양원으로 모셨다. 아버지가 퇴원하면 자주 들르실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4월 2일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였을 거예요.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해놨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바로 받았죠.”

곧장 병원으로 달렸다. 의사 선생님은 혈압이 계속 떨어진다고 하셨다. 유리막 너머로 멀리 아빠 얼굴을 보며 수백 번 되뇌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빠는 이겨낼 수 있어.’

연락을 받고 아침에 고모들이 도착했다. “아빠 혈압이 계속 떨어지나요?” 미림 씨 물음에 의사는 답했다.

“아니오. 최광윤 님... 4월 2일 오전 9시 7분 임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호스 빼고 얼굴을 한 번 더 봤는데 몸이 퉁퉁 부어 있고 까매져 있고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빠가 인공호흡기 때문에 입도 벌리고 계신 그 모습이 너무 충격인 거예요. 잊히지가 않아요.

아버지와 공장

자매는 화장장에서도 아버지 곁을 지키지 못했다. 방호복을 입은 이들이 소독을 하며 관을 운구하는 장면을 먼 발치에서 지켜봤다.

화장은 일반 유가족 차례가 다 끝난 뒤 마지막 순서로 진행됐다. 하루를 꼬박 기다렸는데, 불길 속에 사라지는 건 잠깐이었다.

아버지의 유골과 임플란트 조각을 받아든 미림 씨는 뼛가루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후회할 것 같아서 뼛가루에라도 얘기했어요. 평소에 좀 사랑한다고 말할 걸….”

고 최광윤 씨의 첫째 딸 미림(왼쪽) 씨와 둘째 다슬 씨.

정확히 3주 뒤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임종 하루 전 코로나 완치 판정을 받은 덕분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가족들은 그때서야 아버지와의 이별 과정이 얼마나 많이 ‘생략’됐는지 알게 됐다.

아버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미림 씨가 고집을 피워 유골함만으로 빈소를 차리고 삼일장을 치렀다. 공장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장례식장. 아버지와 같이 수시로 지나쳤던 곳에 아버지를 모시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SNS 속 사진으로 만든 영정사진.자매는 아버지 웃는 얼굴이 예뻤다고 기억한다.

미림 씨는 삼일장을 치르고 다음 날 바로 공장으로 출근했다. 공장은 아버지의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공간이다.

경기도 화성시의 한 마을. 백지 상태에서 일군 공장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거래처를 다녔다. 아버지는 기계 작업을 맡고, 미림 씨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납품을 담당했다.

“미림아, 공장 계속 해야지?” 장례식장에 찾아온 공장 과장님의 말에 용기를 냈다.

사업자 번호는 그대로 두고 대표자 이름만 바꿨다. 기존 거래처를 돌며 인사를 드리고 재기를 알렸다.

“아버지 손때가 묻은 곳을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싶지 않았어요. 책임감 하나 만큼은 아빠를 닮았거든요. 가족들을 제가 다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니까요.”

아버지가 일군 경기도 화성시 공장. 아버지 손때가 묻은 물건들.

1000만 원 돈보다 ‘위로’를

아버지는 억울했다. 잘못이 없었다. 하지만 허술한 행정은 유가족을 두 번 울렸다.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감염됐는지 역학조사 결과를 알고 싶다고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모른다. 아직 안 나왔다’며 구청은 보건소로, 보건소는 구청으로 답변을 미뤘다. 더구나 양성 판정이 나온 요양보호사에게 보건소가 실수로 ‘음성’이란 문자메시지를 보내 혼란을 키웠다.

마음고생이 심해서였을까. 미림 씨는 한 달여 전 몸져 누웠다. 열이 39.5도까지 올라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코로나는 아닐까. 집에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응급실에 실려갔다. 다행히 코로나가 아닌 인파선염이었다.

하늘에서 아버지가 돌봐주신 덕분일까. 충북 괴산에 다녀온 뒤로 조금씩 몸이 회복돼, 겨우 숟가락 들 힘이 생겼다. 괴산은 아버지가 주말마다 찾던 곳이다. 직접 개보수한 컨테이너 하우스와 작은 텃밭이 있다.

아버지는 그곳에 ‘가족 수목장’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본인이 죽으면 거기에 묻어 달라고도 했다. 자매는 언젠가 아버지 바람대로 괴산으로 모실 생각이다.

충북 괴산의 텃밭에서 아버지가 손수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집.

유가족 제공

자매는 요즘 검소하고 무뚝뚝한 얼굴 너머로, 아버지가 얼마나 딸들을 아꼈는지 깨닫고 있다. 공장에서 티격태격하면서도 첫째 딸이 기계를 잡는 것만큼은 말렸던 아버지. 에어건을 다룰 때도 꼭 장갑을 끼도록 했다.

“손 망가진다고 그러셨던 거예요. 지나고 보니까 저를 많이 사랑하셨더라고요.”

미림 씨는 ‘아버지’ 하면 기름때가 잔뜩 낀 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생전에 잡아드리지 못한 게 평생 한으로 남은 손. 거칠지만 따뜻했으리라.

아버지의 기름때 묻은 손. 미림 씨가 아버지 몰래 촬영했다.

유가족 제공

다슬 씨는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열어 보고, 둘째 딸을 자랑스러워했단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딸이 상을 받았다며 지인들에게 자랑하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저한테는 한 번도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 안 해주셨거든요. 만약에 기회가 온다면, 아빠를 꼭 한 번 안아주고 싶어요.”

자매는 큰일을 치르면서 유가족을 위한 제도가 부족한 현실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나라에서 주는 1000만 원으로 뭐해요? 차라리 1000만 원 낼 테니 우리 아빠 살려달라고 하고 싶어요. 심리적인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미림)

“부산일보의 ‘늦은 배웅’ 프로젝트가 정말 큰 위로였어요. 저희를 피하지 않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커요.”(다슬)

애도의 시간을 뺏겨버린 자매에게 필요한 건 거액의 돈도, 의례적인 위로의 말도 아니다. 공감하는 마음 조금, 따뜻한 시선 약간이면 족하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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