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 통이 마지막...
한 줌 재로 만난 어머니

분홍.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색이다. 손수 뜨개질한 분홍 스웨터를 즐겨 입으셨다. 첫 기일인 올해 3월 28일. 어머니가 잠드신 산소도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선산 주변 만개한 벚꽃이 꽃비처럼 내렸다. 1년 전에도 그랬다고 들었다. 유골함을 안고 나오던 길에 화장장 앞에서 흩날리던 벚꽃잎. 최재호(가명·65) 씨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유가족이지만 화장장에 갈 수 없었다. 허락된 인원은 단 2명. 코로나19 사망자란 이유에서다.

어머니가 손수 뜨개질해 즐겨 입으시던 분홍 스웨터.

그림=성유진 작가
제한인원 ‘2인’

꿈에서도 생각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대구 지역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나오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최 씨 가족이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다.

“매스컴을 보고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환자 가족들이 병원 앞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게 뉴스에 나오더라고요.”

어머니가 계시던 요양병원이었다. 2020년 3월 18일. 병원은 즉각 코호트 격리됐다. 병원으로 수십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었다. 다음 날, 어머니를 돌보던 간병사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그걸 보고 우리가 병원에 전화를 했죠. 병원은 전화가 먹통이 돼버렸어요. 거기는 완전히 코호트 격리 상태라 함부로 아무나 못 들어가니까요. 간병사한테 전화하니까 간병사분이 휴대폰으로 받으셔 가지고 어머니하고 통화를 할 수 있었죠.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기침이 조금 난다”고 하셨다. 안도감도 잠시, 다음 날 재검사에서 양성 판정이 나왔다. 열도 오르기 시작했다.

애간장이 녹아내렸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대구의료원으로부터 어머니가 이송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고 일주일 뒤 한 통의 전화. 돌아가셨다는 통보였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한 코로나19 유가족 최재호(가명) 씨.

첫째 형과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최 씨는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형 역시 어머니 시신을 보지 못했다. 몇몇 서류에 사인만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날 화장장에도 2명만 오라고 했다. 어머니 손에서 자란 장조카가 “할머니를 모시겠다”며 나섰다.

“휘날리는 벚꽃이 마치 할머니가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유골함을 받아 나오던 조카가 전했다.
한 줌의 재가 되어 첫째 형님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
요양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뵌 지 한 달 만이었다.

이튿날 아침, 세 형제와 여동생, 며느리와 조카들만 모여 유골함 앞에서 간소하게 재를 올렸다. 당시 상황에서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장례식’이었다. 경북 구미 선산에 안장을 하고 사흘 뒤 삼우제 때 다시 산소를 찾았다. 평소 입으시던 옷과 수의, 유품을 그때 다 태웠다.

분홍 스웨터도 함께였다. 분홍빛이 잿빛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유골을 받아 가지고 형님 집에 모셨어요.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한테 간단하게 제를 올리고 바로 우리 선산으로 갔죠. 그게 장례식인 셈이죠.

죄인이 된 자식들

“아버지 생각을 하면 아들로서, 손자로서, 어머니께 더 죄스럽죠.”

10년 전 집안의 큰 어른이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온 일가친척이 다 모였다. 성대한 장례였다. 향년 91세. 다들 호상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어머니의 마지막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의를 입혀 드리고,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잡아 드리고, 관 뚜껑을 닫고, 빈소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기본적인 장례 절차를 하나도 따르지 못했다. 다른 유가족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병원에는 가지도 못한 채 화장장 앞에서 유골함만 덩그러니 받아 나온 이들도 있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입관 절차는 당연히 할 수도 없었고, 할 생각도 못 했어요.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굉장히 안타까운 거죠.”

최 씨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직장에 일주일 연차를 냈지만, 하루를 더 쉬고 복귀했다. 마음의 상처도 깊었고, 사람들의 시선도 두려웠다. 회사 특성상 외부 사람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점심시간에 구내식당도 함부로 가지 못했다. 몰래 밖에 나가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먹었다.

저 스스로 남한테 또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계속 검사를 해도 음성이 나왔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지 않습니까.

죄인이 된 것 같은 마음은 ‘강박관념’으로 자라났다.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박박 비누칠을 해 손을 씻었다. 퇴근하면 손에 기름기가 없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갈라질 정도였다. 우울증도 찾아왔다. 말을 섞는 게 귀찮을 정도였다. 말수가 적어지니 아내가 눈치를 챘다. 아내 손에 이끌려 억지로 산행을 다녔고,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동병상련’이었다. 요양병원에서 오늘내일 하시던 장모님도 한 달 뒤 돌아가셨다. 차례로 어머니를 떠나보낸 부부. 최 씨는 아내의 존재 덕분에 함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우리 곁의 ‘코로나’

1년이 훌쩍 넘었지만, 지금도 문득 문득 그리움이 밀려온다.

한식당에 가서 된장찌개가 나오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유난히 된장을 잘 끓이셨다. 퇴근길에 어머니 댁에 들러 밥을 먹고 오기도 했다. 온 가족이 어머니 댁에 가면 항상 국수를 해 주셨다. 호박을 채 썰어 볶고, 오이채도 사리 위에 올리고…. 어머니표 잔치국수는 아버지·자식·손주 모두 좋아했다. 어머니도 당신의 국수를 좋아하셨을까.

아직도 된장찌개를 보면 어머니가 떠오른다. 가족들이 둘러 앉아 함께 먹던 어머니표 잔치국수도 사무치게 그립다.

“코로나 사태 초창기엔 사회적인 편견이 느껴졌어요. 아내도 ‘밖에서 남들을 만나기 두렵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코로나가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최 씨는 아직 사돈어른께는 비밀로 하고 있다.

최 씨 주변엔 코로나에 걸렸다 나은 이도 많고, 군데군데 유가족도 있다. 최 씨 부부는 코로나19로 남편이나 부인을 떠나보낸 지인들과도 왕래한다.

“그 무거운 멍에를 개인이 짊어지고…. 계속 마음고생을 하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잖습니까.”

일부 유가족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최 씨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심리치료 등 유가족이 하루빨리 상처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부 지원책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유가족이 안 돼 보면 유가족 아픔을 모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유가족이 안 되는 게 낫습니다. 철저하게 위생관리를 하고, 백신도 맞고, 방역수칙도 잘 지키셨으면 합니다.

빼앗긴 애도의 시간, 그 아픔을 몰라도 괜찮으니 남은 이들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코로나19 유가족의 당부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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